인공지능정책

소버린 AI라는 '마법 상자', 정말 우리에게 필요할까요?

DISMAS 2025. 6. 21. 15:38

소버린 AI라는 '마법 상자', 정말 우리에게 필요할까요?

 
전 세계가 AI 패권 경쟁에 뛰어든 지금, '소버린(Sovereign) AI'라는 말이 자주 들립니다. 우리만의 초거대 AI 모델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국가 데이터 주권과 안보를 위해 우리 기술로 만든 AI가 필요하다는 목표, 물론 중요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목표가 "우리도 외산 못지않은 거대한 만능 AI 모델 하나만 만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야"라는 '마법 상자'에 대한 환상으로 이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잠시 멈춰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특정 빅테크 기업을 중심으로 한 모델 개발을 집중 지원하는 방식이 과연 최선일까요?
최근 AI 분야의 세계적인 리더들이 쓴 "AI Value Creators"( https://www.ibm.com/account/reg/us-en/signup?formid=urx-53618 )라는 책은 이 질문에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AI 시대의 진정한 가치는 '모델의 크기'가 아니라, '문제 해결 능력'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첫걸음: 기술이 아닌 '문제 정의'와 '데이터'

우리는 종종 AI 기술 자체에 매몰되어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곤 합니다. 바로 "우리는 AI로 무엇을 해결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입니다.
AI의 가치는 복잡한 기술이나 거대한 인프라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구체적인 문제를 정확히 정의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할 가장 강력한 무기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데이터'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십 년간 축적한 의료, 법률, 교통, 기후, 행정 데이터는 그 어떤 글로벌 빅테크 기업도 넘볼 수 없는 우리만의 '보물'입니다. "AI Value Creators"에 따르면, 전 세계 기업과 기관이 가진 데이터의 99%는 아직 AI 모델에 제대로 활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진짜 'AI 주권'은 바로 이 데이터를 활용해 우리 사회의 난제들을 해결하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만능 칼'은 없다: 작지만 강한 AI들의 시대

'소버린 AI'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거대 모델에 모든 것을 거는 전략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모든 요리에 쓸 수 있는 '만능 칼'이 없듯, AI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AI 기술의 미래는 특정 목적에 맞춰 고도로 전문화된 '작고 효율적인 모델(SLM)'들의 생태계로 향하고 있습니다. 법률 자문에는 법률 데이터를 집중 학습한 '법률 전문 AI'가, 농업 생산성 예측에는 국내 토양과 기후 데이터를 학습한 '농업 전문 AI'가 범용 거대 모델보다 훨씬 더 뛰어난 성능을 발휘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혁신적인 스타트업들이 활약할 무대가 열립니다. 이들은 무겁고 비싼 거대 모델 대신, 공개된 오픈소스 모델을 활용하거나 자신들만의 작고 날렵한 AI 모델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정 산업 분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여, 국내 시장에 기여하는 것은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도 경쟁할 수 있는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 예를 들어, 한 의료 AI 스타트업이 정부가 안전하게 공개한 건강검진 데이터를 활용해 '한국인 특화 질병 예측 AI'를 개발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 모델은 서구인 데이터 중심의 글로벌 AI보다 한국인의 질병을 훨씬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 스타트업은 국내 의료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나아가 이 기술을 아시아 시장으로 수출하는 새로운 주역이 될 수 있습니다.

 

정부와 빅테크의 새로운 역할: '선수'가 아닌 '생태계의 정원사'

그렇다면 정부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특정 빅테크 기업을 '선수'로 지정해 금메달을 따오라고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수가 마음껏 뛸 수 있는 최고의 경기장을 만드는 '생태계의 정원사'가 되어야 합니다.

  • 빅테크 기업의 역할: 네이버, KT, LG와 같은 거대 기업들은 충분한 자본과 연구 인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들이 자체적으로 초거대 AI 모델에 투자하고 개발하는 것은 당연한 기업의 R&D 활동입니다.
  • 정부의 역할: 정부는 이들과 경쟁하는 대신, 산업 전체를 위한 인프라와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1. 컴퓨팅 인프라 제공: 스타트업과 대학 연구소들이 비싼 GPU 자원 걱정 없이 AI 모델을 연구하고 실험할 수 있도록, 저렴한 비용의 '국가 AI 컴퓨팅 클러스터'를 제공해야 합니다.
  2. 데이터 개방: 공공 데이터를 익명화하고 보안을 강화하여, 혁신 기업들이 안전하게 데이터를 활용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데이터 샌드박스'를 구축해야 합니다.
  3. 인재 양성: 소수의 대기업만을 위한 인재가 아닌, 공공행정과 산업계 전체에 공급될 수 있는 폭넓은 AI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투자해야 합니다.


'소버린 AI'라는 이름의 거대한 '마법 상자' 하나를 손에 넣는다고 해서 우리의 미래가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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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AI 주권은, 수많은 스타트업과 연구자, 그리고 현장의 공무원들이 우리만의 데이터와 다양한 AI 도구를 활용하여 사회 곳곳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의 거대한 AI가 아닌,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할 천 개의 작지만 빛나는 AI 솔루션들을 키워내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이 AI 시대를 선도하는 가장 현명한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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